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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책, 독서] #6. 열한 계단_채사장 지음, 웨일북스

by 꾸우주우니이 2020.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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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열한계단」

 

열한 계단_채사장 지음 

 

 

4p. 저자의 말 : 당신이 표류하지 않고 항해하는 삶을 살기를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말이다. 그는 잔인하게 덧붙인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5p. 성장. 이것은 일생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내가 성취ㅐ야만 하는 숙명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떠게 성장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표류하는 자신을 깨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꺠뜨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 그 외부의 힘이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오래된 지혜다. 

지혜. 정보와 지식이 넘치는 사회가 되었지만, 모든 지식이 지혜일 수는 없다. 우리는 가치 있는 지식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이 무엇인지는 사실 자기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지식들. 일상에서 표류하는 자신을 멈춰 세우고 깨달음으로 밀어 올리는 불편한 지식들을 만나야 한다. 그 지식들은 지혜가 되어 우리를 성장하게 할 것이다. 

6p. 그래서 ≪열한 계단≫은 필연적이다. 이 책은 자아에 대한 탐구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함으로써 어지러운 세계에서 표류하지 않고 하나의 길로 가로지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질문이다. 지금까지 나를 흔들어 키운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변들이 제시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표류하던 개인이 방향을 잡고 나아간 기록이며 항해일지다. 

첫 번째 계단, 문학 / 죄와 벌 / 열여덟,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을 읽었다. 

39p. 그렇게 나는 ≪죄와 벌≫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창밖으로는 천천히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나는 내면의 평화는 이미 깨어졌다. 단조롭고 지루하던 일상은 무너져 내렸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삶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존재임을,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결연한 의지와 실천이 따라야 함을 깨달았다

두 번째 계단, 기독교 / 신약 성서 /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펑펑 울었다. 

그동안 종교서적이라고 생각하며 멀리하였는데 신약성서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 번째 계단, 불교 / 붓다 / 인생에서 가장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순간을 만났다.

108p. 붓다는 기원전 6세기에 히말라야 산기슭의 작은 나라 샤키야족의 왕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 여기서 고타마(Gotama)는 성이고, 싯다르타(Siddahrtha)는 이름이다. '자신의 목표를 성취한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붓다라는 명칭은 무엇인가? 붓다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일반명사로, 깨달음을 얻은 자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붓다는 석가모니라고도 부르는데, 이 말은 '샤키야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117p. 사성제는 불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교리다. 고(苦), 집(集), 멸(滅), 도(道)라는 네 가지 진리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고'제는 고통을 말한다.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함을 직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집'제는 집착을 말한다.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이 집착과 욕망에 있다는 것이다. '멸'제는 소멸을 말한다. 집착을 멈춤으로써 고통을 없애는 깨달음의 목표를 의마한다. 마지막으로 '도'제는 이러한 꺠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행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121p. 여행 끝에 쿠시나라에 도착했을 때, 붓다는 매우 위독한 상태였다. 마지막임을 깨달은 붓다는 목욕을 했다. 제자들에게 사라나무 숲속에 누울 자리를 깔게 했다. 그곳에 바르게 누워, 붓다는 밤늦게까지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전했다. 

"자신이 자신의 등불이 되어라.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처로 삼아라."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붓다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생겨난 존재는 없어지게 되어 있다. 부지런히 정진에 힘써라."

네 번째 계단, 철학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집을 나와 세계를 떠돌았다.

136p.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현실에 발붙이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살아가지 못하고 현실 너머의 그 무엇에 정신을 쏟는 사람이 있다.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떄, 나는 처음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대지 위에 발을 딛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137p. 특히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 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깊은 관계가 있는 세가지 개념, 즉 '신의 죽음', '초인', '영원회귀'에 대해서 확인해본다. 이러한 과정은 접근하기 어려운 책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한걸음 다가가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계단을 더 오르게 될 것이다. 

138p. 이 책에 접근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가 두가지 있다. 

첫 번째는 니체의 작업이 서양 철학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당시까지의 유럽 사상에 대한 반발과 해체를 자기 철학의 기반으로 삼았다. 따라서 니체를 이해하려면 그가 무엇에 반발했고 무엇을 해체했는지 알아야만 하고, 이를 위해서는 앞서 존재했던 서양철학 전반에 대한 대략적인 선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니 동양의 우리가 니체의 철학을 낯설게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두 번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니체 철학의 입문서라기보다는 완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생략]따라서 니체의 철학에 입문하기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 것은 괜찮은 방법이 아니다. 괜찮은 니체 입문서를 우선 보거나, 니체의 다른 책인 ≪이 사람을 보라≫를 먼저 읽는 것을 추천한다. ≪이 사람을 보라≫는 니체가 직접 자신의 저서들에 대해 설명한 그나마 친철한 책이다.

139p.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독일 작센 지방의 뢰켄에서 1844년에 태어나 1900년에 죽었다. 그가 1900년, 즉 19세기의 마지막 해에 죽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근대의 문을 닫고 현대의 문을 열어젖힌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를 묶어서 현대 사상의 출발점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근대를 장악하고 있었던 합리주의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합리주의는 근대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142p. 여기서 알아두면 편리한 개념이 있어서 잠시 정리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앞으로 철학 서적을 읽을 계획이라면 매우 유용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근대성'과 '탈근대성'이라는 개념이다. 서양의 사상과 관련된 책들이 잘 안 읽히는 이유 중 하나는, 저자들이 이 정도는 독자가 구분할 거라고 생각하고 어휘를 혼용해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선 '근대성'은 근대 시대의 이념적 특성을 말한다. 누군가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객관적인 하나의 시대를 말한다기 보다는 근대성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근대성은 구체적으로 이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신뢰하도록 만들었다. 발전, 진보, 성장, 과학, 기술, 이러한 개념들은 근대라는 단어와 혼용된다. 

  다음으로 '탈근대성'은 현대의 이념적 특성을 말한다. 탈근대성은 근대성과 대비된다. 쉽게 말해서 근대의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반대, 합리주의에 대한 저항과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대를 대표하는 개념은 다음과 같다. 반이성, 탈중심, 해체, 다원성. 이러한 개념들은 탈근대라는 단어와 혼용된다. 

 

근대성, 탈근대성 개념

 

149p. 그렇다면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 다시 말해서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내가 발 딛고 있는 구체적 현실로 돌아오라는 니체의 제안이다. 이상적이고 불변하는 본질의 세계 같은 것은 없다. 초월적 세계의 잡히지 않는 그 무엇만을 추구하다가 현실의 건강함을 짓밟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신의 죽음은 필요하다. 

150p. 초인은 삶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자기 자신을 극복한 존재를 말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그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은 존재다. 그는 대지에 속해 있으며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존재다. 그리고 신이 죽은 세상의 허무를 긍정하는 주체적인 존재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초인이 되는지를 상징적인 비유로 알려준다. 그것은 낙타와 사자와 아이의 비유다. 인간의 정신은 세 가지 차원으로 변화한다. 

 

정신의 세가지 변화: 낙타→사자→아이

 

첫 번째. 정신은 낙타가 된다. 낙타가 된 정신은 내면이 외경심으로 가득한, 인내심 많은 강인한 정신이다. 이 정신은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다. 낙타의 정신은 이렇게 외친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그는 사회, 종교, 도덕, 관습이 주는 의무에 순종하고 고통을 인내한다. 스스로를 금욕적으로 담금질한다. 무겁기 그지없는 짐을 짊어지고 사막을 달려간다. 

두 번째. 고독한 사막 한 가운데서 정신은 이제 사자가 된다. 자유를 쟁취함으로써 사막의 주인으로 서고자 한다. 이제 마지막 주인만 쓰러뜨리면 된다. 그것은 신이다. 신은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자는 용에게 달려든다. 용의 이름은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대답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으로서 섬기지 않는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너는 해야 한다' 이것이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사자의 정신은 이에 대항하여 말한다. '나는 원한다'라고." 

'너는 해야 한다'와 '나는 원한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앞의 것이 의무라면, 뒤에 것은 권리다. 노예에게 주어진 의무와 주인에게 주어진 권리. 정신이 사자가 된다는 것은 종속적인 노예가 주체적인 주인으로 일어서려는 저항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자도 새로운 가치는 창조할 수 없다. 사자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조건을 획득하는 것뿐이다. 사자는 그 조건으로써 자유를 획득해낸다. 이제 자유를 획득했으니,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할 때다. 이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정신은 아이가 된다.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고 망각이다.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그리고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다. 왜 새로운 가치의 창조는 아이만이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창조의 과정은 하나의 유희이고 동시에 긍정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긍정해야 하는가? 그것은 신이 죽은 허무한 세상에서 자신과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155p. 이런 영원회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허무주의의 최고 형태다. 이러한 극단적인 허무를 인정하고 나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존재. "이것이 인생이라면 그래, 한 번 더!"라고 외치며 허무의 깊은 심연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초인이다. 

157p. 하늘이 아니라 대지를 걸어가야겠다. 걸어가면서 만나는 모든 것과의 영원한 순간을 긍정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다섯 번째 계단, 과학 / 우주 / 하릴없이 사치스럽게 책을 읽었다. 

162p. 책을 읽는 목적도 없었다. 자기를 계발하거나 지식을 습득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재미있었다. 마음이 가는 책을 산책하듯 읽어나갔다. 책들이 뺴곡하게 꽂힌 서가 사이를 천천히 둘러보는게 좋았따. 서가가 만든 그늘, 적절한 온도, 오래된 책 냄새, 표지의 감촉이 좋았다. 아침 도서관의 한산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철학, 종교, 사회, 과학, 문학 서가를 가리지 않고 배회했다. 마음에 드는 제목과 적절한 두께의 책들을 골라, 대여섯 권 정도가 되면 자리에 앉아 읽었다.

168p. 우리는 다시 여행자가 되어야 한다. 자녀도, 부모도, 모든 우물을 파는 영혼은 다시 여행길에 올라야 한다. 사회, 국가, 종료, 가정, 학교, 직장이 요구하는 의무와 평가에 저항해야 한다. 그들이 당신에게 전문성을 강요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로만 당신을 평가하려 한다고 해서 그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그것이 전부인양 맹목적으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사회와 국가는 당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회와 국가는 당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회와 국가는 오직 당신의 노동력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노동자로 살기 위해 이곳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전문성의 요구에 저항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노동자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국가와 사회가 규정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규정해나가는 주체적인 존재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먼저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당신이 주체적인 존재로 일어설 때, 당신의 자녀도, 가족과 친구도 부러뜨린 다리를 일으키고 꺾었던 날개를 힘차게 펼칠 것이다.

175p. 과학이 진리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학이 자신의 방법론으로써 두 가지를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귀납으로서의 '경험'과 연역으로서의 '수학'이다. 

 

과학의 방법론 / 경험(귀납법), 수학(연역법)

 

181p. 만유인력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놀랍게도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를 끌어당긴다. 어릴 적에 아무렇지도 않게 배운 내용이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태양은 지구를 끌어당기고, 지구는 사과를 끌어당긴다. 사과도 마찬가지다. 사과도 다른 사물을 끌어당긴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연필과 지우개도 서로를 끌어당길까? 이들은 책상 위에 가만히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이들도 서로를 끌어당긴다. 지구의 중력과 책상의 마찰력 때문에 정지해 있을 뿐, 다른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텅 빈 우주에 가져다 놓으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들은 서로를 끌어당겨 결국 접촉하게 될 것이다. 

여섯 번째 계단, 이상 / 체 게바라 / 이상적인 인간을 만났다. 

203p. 이상적인 인간이 있다. 그런 이는 보통 숨겨져 있다. 극한의 상황이 찾아왔을 때, 타인의 시선 때문에 허세를 부리던 사람들마저도 지쳤을 때, 누가 진짜 이상적인 인간이었는지가 밝혀진다. 그는 상황을 핑계 삼지 않고, 부조리에 불평하지 않으며, 자기 삶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말이 아니라 실천하는 이상적인 인간. 자기 삶의 입법자. 

238p. 이상적인 인간의 조건. 

 "그래. 그런 이상적인 인간들은 숨겨져 있어.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지. 왜냐하면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 외에는 타인을 평가할 줄 모르거든. 권력을 잡은 정치가나, 성공한 사업가나, 학벌이 높은 사람이나, 돈이 많은 사람이나.  사람들이 보기에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가시적인 성과를 낸 사람들만이 칭송의 대상이 되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이상적인 이들이 이상적인 이유는 그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서가 아니야. 그들의 내면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지. 체 게바라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쿠바혁명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야. 그는 성공보다 더 많은 실패를 했어. 콩고와 볼리비아에서는 참혹하게 패배했지. 마찬가지로 그가 높은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야. 그가 군의관의 신분으로 쿠바에 상륙했을 때, 혁명군들은 그의 지위가 아니라 그의 용기와 신념을 알아보고 그를 좋아했어. 이상적인 인간은 대중의 평가, 혹은 사회의 인정과는 무관해. 그런 사람은 각자 자기 세계의 범위 안에서 영웅이 되는거야."

일곱 번째 계단, 현실 / 공산당 선언 / 현실적인 인간이 되었다.

247p. 당시에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에게 집이나 차를 산다는 건 돈이 많은 어른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친구들은 이미 어른들의 세계에 진입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놀랐다. 게다가 집을 사는 데 자기 돈은 안들였다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벌었을 거다. H가 겸손하게 이야기한 것뿐이다. 나는 다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248p. 현관을 밀고 들어섰을 때, 불 꺼진 집안의 고요는 여전히 내 숨을 조여왔다. 긴 군 생활 동안 작은 집은 더 작은 집으로 옮겨졌다. 전역한 아들에 대한 반가움은 현실적인 궁핍 속에서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밤이 깊을 때까지 방 한 구석에서 어머니는 기도를 했다. 그녀에게 도피처란 현실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났다. 그딴 건 아무 소용도 없다. 종교는 현실을 구원하지 않는다. 신앙은 가난을 먹고살 뿐이다.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칠 곳이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나는 감옥같이 작은 내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잠을 청했따. 내 유일한 도피처러는 꿈 속 뿐이었다. 나는 자고 또 잤다. 자다 보면 어느새 이번 인생도 끝나 있을 것이다. 

249p. 이상과 현실. [생략] 지금은 안다. 이렇게 불안하고 조급한 시간들도 개인의 성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임을 말이다. 우리는 선입견이 있다. 내면의 성숙은 고결한 방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선입견.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어려운 철학책과 씨름하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조용한 공간에서 사색하는 아름다운 방법만이 우리를 성장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옳은 말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러한 시간 속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얻지 못하는 절반의 배움이 있다. 고결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은 세계에서의 경험들. 부당함에 굴복하고, 부조리에 타협하고, 옳은 주장을 꺾고, 스스로의 초라함에 몸부림칠 때에만 얻게 되는 그런 배움이 있다. 슬프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세계에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나와 타인의 한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나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한 가지에만 집중한 사람들의 한계를 쉽게 본다. 책만 본 사람들과,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 우선 책만 본 사람들의 한계는 타인에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쉽다. 왜냐하면 책의 울타리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까닭에 현실의 폭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다른 사람들이 나약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 발을 디디면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당황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나약함을 부정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모든 일에서 불평불만거리를 찾아내는 사람, 타인의 잘못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 선과 도덕과 정의를 습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 

다음으로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는 자신에게 너무도 너그럽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계획과 일정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는 일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옳고 그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타협과 조율을 통해서만 상황에 따라 문제를 봉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선과 도덕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모든 것을 손익으로 판단하는 사람, 싶연의 깊은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 

여덟 번째 계단, 삶 / 메르세데스 소사 / 어느 날 갑자기 삶이 무겁게 정지했다.

289p. 삶도 그렇다. 외부에서 어떤 에너지가 가해지기 전까지 우리는 지금껏 살아왔떤 삶의 방식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며 유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변은 '그냥'이다. 그냥 이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에, 그냥 지금까지 이런 모습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삶의 방향을 급격하게 전환해야 하는 때가 온다. 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외부의 힘이 삶의 반복을 멈춰 세우고, 나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그런 강력한 계기가 반드시 한 번쯤은 찾아온다. 

312p. 

소사   삶이 뭐라고 생각해요?

환자   네? 

소사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상태가 정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환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제가 노력하고 있잖아요.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먹고 살고, 남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 챙기고, 다만 그렇게 살고 싶을 뿐이에요. 

소사   그건 이미 잘하고 있어요. 그렇게 될 거에요. 

환자   아뇨. 잘하고 있었는데, 노력하고 있었는데, 삶이 제 발을 걸어 넘어뜨렸어요. 

소사   혹시 놓고 온 것이 있어서 불러 세운 것은 아닐까요?

환자   네?

소사  아니면,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아서 불러 세웠을 수도 있지요. 지금 무엇을 가져가고 있나요? 당신 혼자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 지키려는 것들은 뒤에 버려진 채 당신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의 이상. 모두 뒤에 있는 걸요. 

[생략] 

소사   운 좋게도 멈춰 설 기회를 얻었으니, 뒤돌아 가서 놓고 온 것들을 챙기세요. 그리고 다시 천천히 걸어가세요. 또 다시 허둥지둥 달려오면 안 돼요. 길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들을 돌보면서 오세요. 그렇게 천천히 인생의 마지막에 닿았을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삶이 당신에게 정말 주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에요. 

아홉 번째 계단, 죽음 / 티벳 사자의 서 / 모든 것이 때마침 마무리된 날, 죽기로 결심했다.

322p. 이상과 현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한 사람의 삶 속에서 통합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만들어내는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것이 삶이라면, 나도 한번 해보기로 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삶의 끝에 도달할 때까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나.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연습해가기로 했다. 

323p. 생각해보면, 세상에 정말 힘든 일 같은 건 없다. 두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된다. 충분한 시간과 집중할 수 있는 여건.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문제든 처리할 수 있다. 문제는 힘들지 않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주어질 때 발생한다. 정신은 분산되고 신경은 예민해진다. 간신히 처리하던 일들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도미노처럼 일들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모든 일에서 문제가 연쇄적으로 터진다. 관계된 사람들에게 습관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된다. 반대로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쉽게 짜증을 내고 이것이 다시 원인이 되어 신경 쓸 일들이 더 늘어만 간다. 어느 순간 모든 일을 망쳤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330p. 도서관이 더 많고 좋아졌으면 한다. 책은 더 많아지고, 자리는 더 쾌적해지고, 밥은 더 저렵해졌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무엇인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혜를 앞에두고 침묵 속에서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그들의 용기를 사회가 보호해주었으면 좋겠다. 도서관이 있다는 건 위안이 된다. 세상과 내가 빠르게 변해가는 동안에도 도서관은 변하지 않고 언제나 나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으니. 익숙한 고요와 책 냄새. 

345p. 의식은 지능, 감각, 인식, 정체성 같은 것이 아니다. 의식은 지금 당신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드러나는 열린 장이다. 당신의 눈앞에 놓인 것들은 당신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의식 내면에 놓여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의식'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나'와 '세계'의 관계를 통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믿는다. 

352p. 풍족한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지옥이라면 나의 세계는 지옥일 것이다. 반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천국이라면 세계는 천국일 것이다. 

355p. 꿈속에서 마음을 썼어요. 그들이 너무도 고마웠어요. 나의 가족들, 그들의 친절함과, 많은 것을 남기지 못한 미안함. 어떻게 그들에게 내 마음을 표현할지를 그렇게도 마음을 쓰며 안타까워했는데, 꿈이었어요. 꿈에서 깨어난 후에 비로소 알게 되었어요. 이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걸요. 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것에 마음 쓰고 집착하며 가슴 졸이겠지만, 죽고 나면 어차피 사라질 거에요. 꿈이 아무런 기반 없이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겠죠. 허망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든 것인지도 몰라요. 삶이 다시 돌아온다고요. 이 먹먹함을 숨기기 위해 사후 세계를 상상해내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도 몰라요. [이 부분에서 한 방 맞은느낌이들었다. 인생은 한 번. 잘 살아내고 싶지만 끝에선 아쉬움이 남을 인생. 한 번 더 태어나면 지금보다 잘 살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윤회 한다고 이야기를 꺼낸건가?]

열 번째 계단, 나 / 우파니샤드 / 광장에 섰다.

364p. 소중한 것일수록 곁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하고, 부부는 서로 숨기는 게 없어야 하고, 자녀는 속마음을 부모에게 말해야 하고, 연인은 모든 추억을 함께해야 하고, 친구는 나와 가장 친해야 하고, 세상은 나를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의 눈과 입은 원래가 모난 까닭에 가까운 대상일수록 쉽게 흠을 찾아내고, 쉽게 상처를 입힌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들이 상처입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을 당신으로부터 밀어내야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그들을 그리워하는 시간이다. 그리워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고, 아무 말도 없이 깊은 내면으로 고독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375p. 불교와 ≪우파니샤드≫는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입장 차이다. 우선 ≪우파니샤드≫는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고정불변한 자아를 상정하는 것이다. 만약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업에 따른 결과를 수용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연속적이며 불변해야만 한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교의 영혼과 같은 존재다. 그 영혼이 새로운 육체 속으로 옷을 갈아입듯 들어가며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 본질적인 자아를 '아트만(atman)'이라고 부른다. 

384p. 아트만은 누구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도, 누구에 의해서 죽게 도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근원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아트만은 태어난 적이 없으며 죽거나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아트만이 존재하는 곳은 세상의 모든 곳이며 동시에 지혜의 동굴인 인간의 마음속에도 머문다. 아트만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은 '나'이외에는 없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 존재하는 위대한 아트만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은 현명한 사람은 아무런 슬픔도 고통도 갖지 않는다. 야마는 말한다. 

"아트만을 알게 되면 그는 그 순간에 죽음에서 풀려나리라." 

[생략]

아트만으로 인해서 우리는 형태, 맛, 냄새, 소리, 촉감 드을 얻게 된다. 모든 것은 아트만으로 인한 것이다. 이 세상에 아트만으로 인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것은 꿈속의 현상도 마찬가지다. 실제의 세계부터 꿈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은 아트만 때문에 발새한다.

아트만에 대한 설명은 자연스럽게 브라흐만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야마는 말한다. 브라흐만은 물질로 된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자이고, 보이지 않는 지혜의 세상에서도 빛나는 자이다. 브라흐만은 지혜의 세상에서 이루는 것같이 물질 세상에서도 이루는 자이니, 그를 참으로 이해하여 그가 '여럿'이 아닌 '하나'임을 깨우쳐야 한다. 누구든 브라흐만을 '여럿'으로 이해하는 자는 죽음의 쳇바퀴를 벗어날 길이 없다. 야마는 말한다.

"브라흐만에 모든 세상이 의지해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를 벗어날 수 없다. 그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야마는 궁극적인 지혜를 설명한다. 이 단일한 모든 것으로서의 브라흐만이 바로 아트만이다. '하나'인 아트만을 진정으로 깨우친 사람의 아트만은 근원 아트만으로서의 브라흐만과 합쳐진다. 라흐만과 아트만은 하나다.

"현세에서 마음속의 모든 매듭이 풀리게 되면, 그때 그 사람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이 될 것이다. 이게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다."

391p. 내 눈앞의 세계가 실제로는 내 내면의 세계라는 것을 알겠어. 실제로 존재하는 건 관조하는 주체로서의 나뿐이지.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런 걸 알아서 뭐하나? 왜 내가 이런 걸 알아야 하는 거지? 여러분은 이런 질문에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범아일여의 꺠달음이 영원한 자유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윤회의 고리를 끊고 너를 놓아줄 것이다. 

열한 번째 계단, 초월 / 경계를 넘어서 / 여행이 시작되었다.

396p. 여행자. 그것이 모든 나라는 존재의 직업이고 숙명이다. 나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고 즐기며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그러한 길고 긴 여행 중에서 우리는 운명처럼 성장할 것이다. 

401p.  나의 경계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에겐 경계가 없다. 나는 모든 것에서 이어져 있다. 삶과 죽음에서, 내면과 외부에서, 자야와 세계에서. 그래서 이것이 슬픔이 된다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구면의 밖으로는 어떻게 나가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이 의식의 지평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참고한 책

 

참고한 책

 


  지대넓얕1,2를 읽고 지식의 확장을 느낀 바가 있다. 그 이후로 지대넓얕 팟캐스트도 찾아 듣게 되었고, 철학,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지대넓얕은 손꼽는 책 중 한 권인데 ≪열한 계단≫또한 소장각이다. 지대넓얕 1,2가 나에게 지식을 확장시켜주어 깨달음을 주었다면 열한 계단은 채사장의 에세이로 인생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느꼈던 질문과 깨달아가는 과정 속에서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보았다. '역시 채사장'이다. 채사장의 신간인 ≪지대넓얕0≫도 읽어봐야 겠다. 더불어 참고도서 중에서도 몇 권 골라 읽어보려 한다. 

≪죄와 벌 1,2≫,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민음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지음, 장회창 옮김, 민음사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티벳 사자의 서≫, 파드마삼바바 지음, 류시화 옮김, 정신세계사
@ 그리스로마신화 / 신약성서 / 르네상스 /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이 사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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